대구지방검찰청

규칙을 어기면 강냉이 털린다. 8월호 News Pros 입니다.

황금천 2008. 8. 3. 23:09

 

[8월호] 2008년 8월 4일 (월) [구독신청][지난호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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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를 웃도는 더위에 능률은 안 오르고 책상에 앉아 일을 하려고 해도 펜이 손에 안 잡히고 무엇을 먹어도 입맛이 돌지 않는 이런 날 가끔은 차가운 음식보다 콧잔등에 송글송글 땀을 맺으며 “아하~ 하!! 시원하다 소리가 절로 나고 칼칼하고도 입에 쫙쫙 달라붙는 이 맛을 찾아가곤 한다. 얼큰하면서도 알싸한 이 맛 과 반찬으로 나오는 도시락만한 대왕 계란말이, 보기만 해도 뿌듯한 음식과 주인-이모들의 인심과 마음이 돋보인다. (밥은 무한 리필 가능) 하지만 부대찌게가 전부가 아닌 이곳 점심을 먹고 퇴근시간이 되면 이곳의 앞마당은 어느새 (자칭)방실이 이모의 ‘포장마차’로 변해 있다. 퇴근 후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시원한 소주한잔을 기울일 수 있는 곳. 그 곳만의 “웬만하면 셀프” 라는 규칙을 따르고 그것을 지키면 푸짐한 서비스안주 ( 닭똥집, 닭발, 계란말이, 돼지껍데기)가 나오며 규칙을 어기면 강냉이 털리는 건 고사하고....
그 때 그 사건 [여름특집]
이 사건을 수사한지 벌써 4년이 흘렀다. 그 때도 지금처럼 무덥고 비가 많이 내리는 때였다. 만 4년 전의 일인데도 어제 일 같기도 하고 아득한 옛날 일 같기도 하다. 그 동안 이 사건 총괄책임자인 이동호 부장님(순천지청장 역임), 부책임자인 이승영 부부장님(인천지검 부장검사 역임), 그리고 주임검사인 나와 최관수 검사는 검사직에서 사직을 하였다. 수사에 많은 도움을 주었던 홍용준 검사, 변필건 검사, 김수민 검사는 훌륭하게 검사직을 수행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이런 사건을 후일담으로 써도 되는 것인지, 수사백서도 아닌 후일담이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쓴다면 어느 부분까지 어떻게 써야 하는지 난감함이 앞서지만 절친한 후배검사의 요청을 거절하기 어려워 써보기로 결심하였다. 후일담으로 인해 혹시 당시 경찰수사관계자 등에게 곤혹스러움을 안겨줄까 염려스럽고 한편으로는 사형미행자로 남아 있는 유영철을 불필요하게 자극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유영철은 당시 나에게 많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사건의 개요는, 유영철이 부유층에 대한 적개심을 품고 2003. 9월부터 같은 해 11월까지 사이에 4곳의 부유층 주택에 침입하여 8명의 노인을 살해하고, 우발적으로 황학동 노점상 1명을 살해하고 동대문구 이문동에서 부녀자 1명을 살해하였으며, 몸을 파는 여성들에 대한 환멸감을 느낀 나머지 2004. 3월부터 같은 해 7월까지 사이에 출장마사지사 11명을 살해한 후 암매장하는 등 총 21명을 연쇄살해하였다는 것이다.
청백리(淸白吏) 가득한 세상, 그날까지 쭉~
조선시대 감찰들은 어떠한 일을 하였을까요? 한 마디로 말하자면 곡식의 출납과 조회, 제사는 물론, 크고 작은 거의 모든 국가적 행사에 감찰이 끼지 않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관원의 불법 행위, 부당한 상거래, 과거시험에서의 부정 등 거의 모든 국가적 사무가 감찰의 대상이 되었던 것이죠. 그리고 감찰 업무의 특성상 편안히 감찰방에 앉아 사무를 보는 내근보다는, 감찰방 밖으로의 외근이 휠씬 많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때문에 24명이라고 하는, 조선 시대로서는 아주 대규모의 관원을 배치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한 가지 의문점이 생깁니다. 도대체 사헌부는 다른 관청에서 집행하는 수많은 대소 행사를 어떻게 다 알고 차질 없이 감찰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일까요? 사실 사헌부 혼자 독자적으로 국가 행사의 집행 날짜를 일일이 파악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대신 조선 정부는 감찰이 입회해야만 집행될 수 있는 행사의 종류를 일일이 법률에 규정해 놓았으며, 아울러 국가 행사를 주관하는 관청으로 하여금 행사 수일 전에 공문으로 행사 사실을 사헌부에 통지하게 했으므로 이를 모두 알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감찰의 파견을 요청하는 공문이 사헌부에 접수되면 주무 책임자인 장무지평(掌務持平)을 통해 간부회의에 보고 되고, 여기에서 업무 분담이 결정되면 외근해야 할 감찰은 곧 자신이 배정받은 관청으로 근무를 하러 떠나는 절차가 진행되었습니다. 이렇듯 조선 시대에는 오늘날만큼 국가 행사 일정을 명문화했을 뿐 아니라, 오늘날보다 더 체계적으로 거의 모든 국가 행사에 감찰이 입회함으로써 행사 절차 준수 여부와 이 과정에서 생길 수 있는 부정의 여지를 차단하려 하였던 것입니다. 감찰의 부정을 막기 위해 매일매일 담당 감찰을 바꾸기도.. 그러면 조선시대 감찰 활동 중 가장 비중이 컸던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지금도 그렇지만 조선시대에도 국가사무 중 금전출납과정에서 관리들에 의한 부정이 저질러질 가능성이 많았습니다. 실제로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부정이 저질러졌기 때문에, 정부에서는 이를 예방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조선 정부는 공공기관에서 금전을 출납할 때에는 반드시 사헌부 감찰로 하여금 입회하도록 하였습니다. 감찰이 입회하여 관련 문서를 검토하고 서명해야만 비로소 곡식이나 직물, 화폐 같은 물품이 출납될 수 있었습니다. 또 심지어는 출납되는 물품의 수량과 품질까지 직접 확인하고 점검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렇듯 사헌부 감찰의 감독을 통해 전곡 출납 자체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부정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공무원의 부당한 업무 처리나 부정을 적발하는 일을 해야 할 감찰이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여 부정을 저지르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태종 7년(1470) 군자감(軍資監)의 입회와 감독을 담당하던 감찰 이운적이 군자감 판사 황한우와 짜고 각 도에서 바치는 상납미를 정해진 액수 이상으로 징수하여 여기에서 생긴 여분의 미곡을 둘이 나누어 가졌다가 발각되어 파직되는 등 여러 가지 부정이 발생하였던 것입니다. 이러한 경우 조선 정부는 어떤 대책을 세웠을까요? 감찰 과정에서의 폐단 때문에 감찰이 전곡 출납을 감독케 하는 제도 자체를 없앴을까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되면 출납을 전담하는 재정 관청 관원의 부정과 비리가 더욱 기승을 부릴테니까요. 손가락에 종기가 생기면 이를 치료할 방안을 찾아야지, 손가락 자체를 자를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조선 정부는 감찰이 부정을 저지르게 되는 가장 주된 원인을 다음과 같이 파악하였습니다. 한 명의 감찰이 특정 관청의 전곡출납을 6개월 이상 담당하여 감독 감찰과 해당 관청의 관원 사이에 맺어지는 두터운 친분 관계 형성이 문제라고 말이죠. 이렇듯 둘 사이의 친분이 생기면 웬만한 잘못은 뇌물을 받고 덮어주기도 하고, 더 나아가 양자가 공모하여 부정을 저지르기도 했던 것입니다. 이에 대해 조선 정부는 오랜 고심 끝에 6개월 이상의 장기 감찰 제도를 폐지하고 매일매일 담당 감찰을 바꾸도록 제도를 개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매일 아침에 열리는 사헌부의 간부 회의에서 이를 결정하여 감독 감찰과 해당 관청의 관원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친분을 최소화하고 부정과 비리를 줄어들게 하였습니다.
저도 가슴이 아픕니다...
사건을 송치 받은 며칠 후, 오빠인 임갑돌은 여동생이 매일 술을 마시고 자식들을 버려두고 다른 남자를 만나서 훈계하다가 죽이게 되었다고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흘리면서 연신 죄송하다, 죽여달라고 말을 하였고 어머니인 정순이는 몸이 아프다는 이유로 조사를 받기 어렵다는 말을 되풀이 하고 있었다. 도대체 피해자가 왜 그렇게 어머니와 오빠에게 맞아야 했는지, 그래서 죽음까지 당해야 했는지에 대해서 알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죽은 여자의 남편을 불렀다. 남편은 여행사 운전기사라는 직업상 집을 자주 비워서 죽은 부인이 술을 자주 마셨는지, 집을 자주 비웠는지 등에 대해서 잘 모르겠다고 하면서 다만, 평소 부인이 이상한 종교인지 뭔지를 믿어서 자신이 몇 번 뭐라고 한 적이 있다는 말을 하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멀리 한줄기 빛이 보이는 것 같았다. ‘종교적인 이유가 개입되었을 수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갔다. 그런데 그 남편이라는 사람은 가정생활에 대해서 너무 모르고 있어 수사에 거의 도움을 주지 못하였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사망한 여성의 아들을 그 남편과 함께 나와 줄 것을 부탁하였다. 그 아들은 아직도 어린 아이 티를 벗지 못한 중학교 1학년 학생이었다. 어머니의 평소 생활이 어떠했는지 물어보았다. 그런데 웬걸 이 학생이 아주 똑똑하였고 너무나도 자세히 사건과 관련되는 일들을 진술하였다. 그 진술 내용을 요약하면 「우리 엄마는 술을 거의 마시지 못한다. 엄마가 술 마시는 것을 본 적이 없다. 지금 살고 있는 집은 몇 달 전에 한밤중에 갑자기 이사한 집이다. 원래 살고 있던 집은 4층짜리 건물 3층에 살고 있었는데 그 건물 4층에 “선생님”이 살고 계셨다. 어머니와 저는 가끔 선생님한테 불려 올라가서 물벼락을 뒤집어쓰고 막대기로 맞기도 하였다. 똑바로 살아라라는 말을 많이 들었다. 외삼촌도 엄마를 때린 적이 있는데 어떤 때는 엄마가 코피를 흘리면서 4층에서 3층 집으로 뛰어내려온 적도 있었다. 선생님은 흰 옷을 입고 있고 가끔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산이나 절도 가고 선생님 건물에 모여서 제사도 지내고 그런다.」라는 것이었다. 피해자의 아들에게 혹시 집에 있을지 모르는 어머니의 일기장이나 가계부, 메모장 같은 것을 가지고 오라고 하였다. 열 몇권의 일기장, 가계부 등을 가져왔는데 가계부를 살펴보니 10원짜리 지출한 것에 대해서도 매일매일 꼼꼼히 그 내역이 기재되어 있었고 일기장에는 ‘친정을 멀리하자, 아들이 위험하다, 내가 먼저다. 가족을 지켜야한다.’라는 메모가 발견되었을 뿐만 아니라 매월 어머니, 선생님에게 몇 만원에서 몇 십만원씩 준 내역이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추가 피해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관련 계좌를 특정해서 계좌추적을 시작하였고 사건 초등수사를 담당하였던 경찰관들을 불러 피해자의 주변 이웃, 소위 ‘선생님’의 주변 이웃들의 인적사항과 연락처, 주소, 집의 위치 등을 파악하여 올 것을 지시하였다. 한편, 위와 같은 진술 및 피해자의 메모, 가계부 기재내역을 토대로 오빠인 임갑돌, 어머니인 정순이에게 추궁하였지만 자신들이 딸의 방탕한 생활을 혼내다가 사망에 이르게 한 잘못이 있기는 한데 종교와는 전혀 거리가 멀고 ‘선생님’은 아무런 상관도 없다고 진술하였다. 하지만, 임갑돌과 정순이의 눈빛에서 소위 ‘선생님’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와 믿음이 보였다. 마음속으로 ‘아, 종교의 힘이 이렇게 무서운가보다.’라는 생각이 스쳐갔다. 피해자의 어머니인 정순이의 구속 그 사이 사망한 피해자, 피의자들 및 주변 관련인들에 대한 광범위한 통화내역 조회가 완성되었다. 계장님들이 밤 늦게까지 날짜별, 시간대별로 전화를 주고받은 내역을 상세하게 정리하였는데 이는 사건 관련자들이 허위진술을 할 때 이를 추궁하고 진실을 얻어내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통화내역 분석 결과 변사자가 사망한 즈음에 어머니인 정순이가 택시기사와 통화한 내역이 발견되어 해당 택시기사를 조사하였는데 ‘전화를 받고 가보니 젊은 여자가 정신을 잃고 건물 4층 마루에 누워있었다. 그래서 그 딸의 어머니인 듯 한 사람과 함께 병원까지 실어다 주었다.’라는 내용이었다. 사망자의 중학생 아들, 일기장 및 가계부의 내용, 택시기사의 진술 등을 토대로 사망한 피해자의 어머니 정순이에 대한 영장을 재청구하였다. 영장재청구 사유는 피해자가 사망한 장소, 경위, 동기 등이 의심되며, 다른 공범자가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자세히 적시하였다. 물론 종교적 이유 및 종교 관련자가 피해자의 사망에 가담하였을 가능성도 기재하였다. 영장심문에 직접 참여하여 정순이에 대하여 직접 신문을 하는 등의 노력으로 정순이를 구속시켰다. 구속 직후 정순이, 임갑돌 등 관련자들에 대한 구치소에서의 접견 및 면회를 일체 금지시켰다. 그 어머니는 구속된 이후에도 여전히 딸의 음주 및 복잡한 남자관계를 꾸짖다가 벌어진 일이고 ‘선생님’은 아무런 상관이 없으며 선생님의 집으로 간 것은 사실이지만 놀이터에서 딸을 꾸짖다가 딸이 정신을 잃어 자신이 혼자 딸을 업고 4층 선생님 집으로 가서 물을 뿌렸다고 진술하였다.(딸의 몸무게는 어머니보다 무려 15킬로그램이 더 나갔고 건물에는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어머니를 상대로 계속하여 설득하였다. “딸이 아무리 잘못하였다고 해도 맞아서 죽을만큼 잘못하였느냐, 딸이 왜 죽었는지, 누가 죽였는지, 어떻게 죽었는지는 밝혀줘야하지 않겠느냐, 아무리 미워도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사람 아니냐... 선생님이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고 해도 잘못한 부분이 있으면 밝혀야하지 않겠느냐” 며칠 동안 점심, 저녁을 함께 먹으면서 설득하고 또 설득하였다. 어머니의 얼굴빛이 조금씩 바뀌는 것이 보였다.
해외 Report
호주 영화 중에 ‘토끼 방지 장벽(Rabbit Proof Fence)'이라는 영화가 있다. 야생토끼가 경작지로 넘어와서 농작물에 피해를 입히는 것을 막기 위하여 광범위하게 장벽을 친 것이 위 토끼 방지 장벽인데, 원주민 아이들이 백인들에 의하여 강제수용소에 격리되었다가 원래 살던 곳 주변에 위 토끼방지장벽이 있었던 것에 착안하여 이를 방향타 삼아 2,400킬로미터나 되는 거리를 걸어서 탈출한다는 내용이다. 이 영화는 실화를 토대로 제작된 영화인데, 무척 놀랐던 것은 어학연수 기간 중 위 영화를 어학연수를 하는 전 세계 학생들을 대상으로 상영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부끄러운 과거를 다룬 영화를 세계 각국의 어학연수생들에게 보여주는 것을 보며, 비록 백호주의 및 백인우월주의의 잔재가 사회 전체에 찌꺼기처럼 끼어 있다고 하더라도, 과거 다른 인종에 저질렀던 잘못을 정면으로 직시하며 진지하게 반성하는 모습이 오늘날 이민자의 나라, 다민족국가인 호주를 하나로 묶어주는 저력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여 보았다. 배경이 다른 이민자들을 어떻게 결집시키고 융화시켜 나갈지... 호주는 넓은 땅덩어리에 비해 인구는 턱없이 부족한 나라이다. 인구는 2007년경을 기준으로 약 2,100만명이 조금 넘는 수준인데 반하여 땅덩어리는 남한 면적의 78배에 해당한다고 한다. 강대국의 조건 중에서 땅의 넓이는 충분한데 인구가 적다보니 오히려 여러 가지 문제를 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국가 안보 측면에서도 국토에 비하여 인구가 너무 작고, 천문학적인 비용을 들여서 도로 등 인프라를 구축하더라도 이를 이용하는 인구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국가적으로 지나치게 효용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 호주에 살다보면 대중교통이 너무 열악한 수준임을 알 수 있는데 이러한 것도 위와 같은 문제와 같은 선상에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므로 호주는 인구를 늘이기 위하여 출산장려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그러나 자체 출산만으로는 적정 인구로 나아가는데 턱없이 부족하여, 자국으로의 이민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호주가 이민자의 나라로 계속하여 남을 수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러한 호주가 백호주의와 백인우월주의의 잔재를 극복하고 각 문화적 배경이 다른 이민자들을 어떤 방법으로 결집시키고 융화시켜 나가는지에 대해 지켜보는 것은 남은 연수기간 동안 여전히 흥미로운 일이 될 듯하다.
검찰인의 세계
2008년 7월 지금 내 나이 39살... 아내와 두아이의 아빠로 행복한 삶을 살고 있지만 나에게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해프닝처럼 생각되지만 내 인생에 있어서 새로운 출발점이기도 했던 때다. 1999년 9월 나는 다니고 있던 회사가 IMF로 어려워지면서 그만두게 되었고 나에게는 고난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공무원 시험을 본다고 공부도 하고 시험을 보면서 1년의 백수생활이 지나고 있을 즈음에 나에게 소중한 기회가 찾아왔었다. 그 동안 나름대로 성실하게 살아온 탓에 검찰이라는 곳에는 발길한번 해본적이 없는 나에게 범죄 피의자로서가 아니라 직원으로서 채용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바로 서울중앙지검에서 기능직 운전원을 특별채용 한다는 소식이었다. 기회가 온 것이다. 물론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따로 있었지만 한 가정을 책임져야할 가장이었기에 그 당시에는 그리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끔 눈시울이 젖곤 한다. 나의 백수생활로 빠듯했던 살림임에도 불구하고 대형면허를 취득할 수 있도록 도와준 아내 덕분에 나는 당당하게 중앙지검에 입사하게 되었다. 한 동안 IMF로 백수생활을 했던 내가 검찰가족의 일원이 된 것이다. 처음 입사 후 나의 속마음은 한 1년쯤 다니면서 진정으로 하고 싶은 나의 길을 찾으려 했으나 그것 역시 쉽지만은 않았다. 특히, 나의 가족에게 또 다시 실망을 안겨 주는 것은 나를 기대고 따르는 가족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나는 처음에 먹었던 마음을 접고 나의 특기이자 장기인 성실함과 끈기로 검찰가족의 일원이 되어 생활해온 덕분에 지금의 이 자리까지 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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