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리끼리 살지 말고 함께 살아야 한다 / 이준행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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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회의 특징은 외적인 것, 나타난 결과로 평가하는 것입니다. “이겼는가? 몇 등인가? 돈이 많은가? 학벌이 좋은가? 예쁜가? 사회적인 지위가 있는가?” 이런 것으로 평가하기 때문에 열심히 노력하여 최선을 다 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쟁에서 뒤떨어지면 실패자로 취급을 받습니다. 그래서 강한 사람은 강한 사람끼리, 부자는 부자끼리, 지식인은 지식인끼리, 권력이 있는 자는 권력이 있는 자끼리 어울립니다. 함께 살려고 하지 않고 끼리끼리 살려고 합니다.
예수님 당시의 사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유대인은 유대인끼리 어울렸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개처럼 무시해서 대화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눅,17장에 등장하는 열 명의 나병환자 이야기를 보면 유대인 아홉 명에 사마리아인 한 명이 함께 어울려 다니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도저히 어울릴 수 없는 사람들인데, 나병에 걸렸더니 더 이상 외모로 서로를 차별하지 않았습니다. 인생의 밑바닥으로 내려가 생명의 문제에 집중하면 더 이상 경쟁관계도 아니고, 외모로 대결하는 것도 아니고, 함께 손을 잡고 협력하며 살 길을 찾습니다. 외모를 버리고 밑바닥으로 내려갔더니 유대인이나 사마리아인이나 동일하게 대화하며 한 목소리를 낼 수 있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에게 몸을 보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사장에게 보인다는 것은 나았다는 사실을 검증받는 것입니다. 가는 중에 나병으로 인해 상한 몸에 새살이 돋아나고 있었습니다. 눈을 씻고 다시 보아도 자신들의 몸 안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들이 느꼈을 기쁨과 환희는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컸을 것입니다. 열 명이 경험한 주님의 능력은 동일했습니다. 그러나 그 후의 반응과 행동은 서로 달랐습니다.
나병 걸렸을 때는 차별이 없었는데, 나병에서 해방되자마자 다시 차별을 받는 세계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유대인은 유대인의 사회로, 사마리아인은 사마리아의 사회로, 서로 무시하며 차별이 있는 사회로 돌아가야 했습니다. 아홉 명은 병 때문에 유대인이면서도 유대인의 사회에서 살지 못했습니다. 외적 요인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밀렸습니다. 경쟁에서 밀렸고, 실패자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병이 낫는 순간 희망이 생겼습니다. 빨리 유대인의 사회로 돌아가 다시 유대인으로 인정받고 싶었을 것입니다. 더 이상 사마리아인과 함께 다니는 수모를 겪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그들은 끼리끼리 어울릴 수 있는 유대인 사회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사마리아 사람은 아홉 명과 함께 가지 않았습니다.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님께 엎드려 감사했습니다. 종은 울리는 소리가 나야 종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은혜를 깨닫고 그 마음에 벅찬 감사로 주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그리스도인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왕으로 인정하는, 하나님 앞에 엎드리는 사람들을 찾으십니다. 이런 사람들이 모인 곳이 교회요, 이 땅에 세워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교회를 이룬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줄 아는 사람들이요, 그 은혜가 너무 감사하여 모든 인생을 주님 뜻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주님께서는 넉넉히 감사할 만큼 풍성한 은혜를 베풀어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더 이루고 싶은데 이루지 못한 것, 더 얻고 싶은데 얻지 못한 것, 이런 것들만 생각하며 원망과 불평에서 헤어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깊이깊이 깨닫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온 사마리아인처럼 살기를 소망합니다. 주님 앞에 엎드려 감사로 원망과 불평을 이기고, 더불어 살며 서로를 세워주는 하나님의 가족 공동체인 교회들을 사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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