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에 대한 올바른 이해
강화중학교 교사 전 갑 남
1. 들어가면서
[상담사례]
중3 여학생입니다.
남자친구들과 어울리다가 한 녀석에게 성폭행을 당했습니다.
이 사실이 내가 사귀는 남자친구에게 알려질까 봐 너무 걱정이 됩니다.
세상에는 비밀은 없다는데....
순결을 빼앗긴 몸으로 좋아하는 친구를 계속해서 만나야 하는 것인지...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어른들께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나보고 잘못했다고 야단치실 것이 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성폭행을 한 녀석이 죽이고 싶도록 미운데 신고할 수도 없고....
내 몸과 마음이 망가진 것이 너무 힘이 듭니다.
생각하면 내가 잘못한 것은 아닌가 하는 죄책감이 들기도 합니다.
위 학생은 필자가 운영하는 홈페이지(http://jun5417.pe.kr)를 보고 메일을 통해 상담을 요청한 경우입니다. 성폭력이 일어나는 것은 이 사회의 가장 어두운 그림자입니다. 학생의 상담내용처럼 성폭력을 당한 피해자는 매우 견디기 힘들 정도로 몸과 마음에 깊은 상처를 받습니다. 따라서 자녀들에게 성폭력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려 주는 것은 책임감 있는 한 인간으로 성장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주는 일입니다.
성폭력이란, 상대방의 허락 없이 강제로 성과 관련한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것에는 강간뿐만 아니라 성적인 희롱과 성추행, 음란전화, 강제매춘 등이 모두 포함됩니다. 또한 성폭력에는 신체적인 폭력과 함께 정신적, 언어적 괴롭힘도 포함됩니다. 다시 말해서 성폭력에 대한 불안감이나 공포심의 조성, 그로 인한 행동제약도 간접적인 성폭력에 해당됩니다.
여기서는 성폭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디까지를 성폭력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와 성폭력의 예방과 대처방안에 대해 논의해보고자 합니다.
2. 성폭력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2001년도 상반기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내 놓은 자료를 분석해보면 성폭력의 가해자는 아는 사람이 78.59%, 모르는 사람이 16.91%, 미상이 4.50%의 분포를 보이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피해가 아는 사람에 의해 일어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성폭력에 대한 잘못된 생각들이 많이 있습니다. 성폭력은 모르는 사람에 의해 우발적인 성충동에 의해 저질러지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폭력의 가해자는 성폭력의 시간과 장소를 치밀하게 계획하고 실행에 옮긴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폭력 범죄자는 일상생활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하는 정신이상자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가해자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 사람들입니다. 직업이나 계층적 특수성도 나타나지 않고 있습니다. 도리어 성실한 직업인으로 혹은 착실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의 소외감, 열등의식, 박탈감, 분노 등을 표출할 대상으로 성적인 공격에 대해 무력하다고 생각되는 여성과 어린이를 택했을 뿐입니다.
우리사회에서 성폭행을 당한다는 것은 여성에게 가장 중요한 순결을 잃은 것으로 수치스럽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성폭력을 당한다 할지라도 비밀로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믿고있습니다. 이 잘못된 통념 때문에 성폭력이 노출되는 경우는 전체 성폭력의 2%에 지나지 않는다고 합니다. 반면 폭력을 저지른 남성에게는 순간적인 본능에 의해서 어쩔 수 없이 저지른 일순간의 실수라며 덮어버리려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성폭행을 남성다움의 과시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뿐만 아니라 여자가 저항하지 않았고, 노출이 심한 옷을 입었기 때문에 남성의 성충동을 자극했다고 그 책임을 여자에게 돌리며 비난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여기서 청소년들에게 성폭행이라는 것은 결코 피해자의 잘못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알려줘야 합니다. 이는 강도를 당한 사람이 자신의 잘못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폭행도 자신의 의지와 관계없이 이루어진 범죄행위이므로 비록 성폭행을 당했다하더라도 순결과 결부시키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시켜줄 필요가 있습니다. 처녀막파열과 같은 육체적 순결을 잃은 경우에 정신적 순결을 지키고 있었다면 아무도 순결을 잃었다고 탓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어디까지 성폭력으로 보아야 하는 것인가?
성폭력은 일반적으로 상대방의 의사에 반하여 강제적으로 성과 관련된 폭력을 행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강간만 당하지 않았으면 다른 신체적인 접촉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폭력은 신체적인 접촉을 얼마나 했는가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가벼운 추행이라고 해도 당하는 사람이 심각할 정도의 모욕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성폭력이라고 해야 합니다.
한 여중학생이 컴퓨터 채팅을 통해 회원들과 대화를 나누다가 자신에게 성적인 모욕을 하는 내용이 자주 화면에 나오자 그것을 비관해 자살까지 한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런 사건의 경우는 신체적인 접촉은 전혀 없었지만 심한 수치심과 정신적 모욕감에 분노를 느끼고 자살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
따라서 성폭력은 동의하지 않는 행동이라는 데 중점을 두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성을 매개로 하여 상대방의 동의 없이 가해지는 모든 신체적, 정신적, 언어적 폭력 모두를 성폭력으로 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4. 데이트 성폭력 무엇이 문제인가?
성폭력의 유형에는 여러 가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우리 청소년들 사이에 가장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고, 문제가 되는 것이 데이트 성폭력입니다. 데이트 성폭력은 14세 이상의 남녀쌍방이 이성애의 감정이 있거나 그 가능성을 인정하고 만나는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입니다.
이성교제를 통해 어느 정도 친밀감이 형성된 가운데 남녀가 서로 만나서 호감을 느끼게 되면 급속도로 가까워지는 것은 당연합니다. 만나면 손을 잡고 싶고, 손을 잡으면 어깨를 안고 싶고, 그리고 키스도 하고 싶어집니다. 더욱이 남성은 여성에 비해 성적으로 성급하기 때문에 특별히 나쁜 마음을 갖지 않더라도 생물학적인 특성으로 인해 여성에게 성적 행동을 성급하게 요구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따라서 10∼20대의 이성간의 데이트 중에 성폭력이 주로 일어나며 의사소통이 잘 되지 않아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여자가 '안 된다'고 말해도 남자는 내숭을 떠는 정도로 인식한다던가 '좋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 쉬운 상황에서 발생합니다. 때로 남자들이 데이트 상대를 자기만의 여성으로 묶어두기 위한 방편으로 여자의 동의 없이 강제적으로 성관계를 갖고자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데이트 성폭력은 피해 당사자조차 강간으로 인식하기 어렵고 가해자와의 사적인 관계 때문에 법적 처벌을 함에 있어서 어려움이 많습니다. 데이트 성폭력은 단순히 한 순간의 열정에 의한 범죄가 아닙니다. 그것은 한 여성과 한 남성의 인간적인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존중할 줄 아는 사람은 상대가 성적으로 원하지 않는 것을 절대로 강요하지 않음을 똑바로 알아야 합니다.
5. 성폭력피해 후유증의 심각성은?
성폭력의 피해는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광범위하고 정도도 심각하며, 그 후유증은 상당히 오래 지속됩니다. 다만 그 동안 성폭력 피해자들의 경험이 잘 드러나지 않았기 때문에 피해의 극심함이 제대로 인식되지 못했을 뿐입니다.
특히 강간 피해자들의 체험은 상상할 수도 없고, 말로 표현할 수도 없을 만큼의 비인간적이고, 모욕적인 경험인 셈입니다. 상당수의 피해자들이 불면증, 우울증, 무기력증에 시달리며 약물중독이 되거나 자해행동까지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강간을 순결상실과 동일시하는 풍토로 인해 피해자들은 자신이 순결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오랫동안 고통을 받습니다. 이런 불필요한 고통들은 여성에게만 순결을 강요하는 성규범, 그리고 '강간당한 것'을 '성관계한 것'과 동일시하는 우리사회의 성문화가 개선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강간은 '강제적인 성관계'가 아니라 '인권에 대한 폭력'임을 인식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성폭력의 피해자는 부상, 임신, 그로 인한 낙태, 성병의 감염에서 오는 육체적 고통 등을 겪을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공포와 우울증, 불안, 좌절과 죄의식, 수치심, 가해자에 대한 혐오감 등으로 시달리다가 정신병으로 발전하거나 자살에 이르는 경우도 있습니다. 또, 비단 성폭력은 본인에게 신체적, 정신적 피해를 줄뿐만 아니라 한 가정, 나아가 사회전체를 망가뜨리는 사회적 범죄가 될 수 있음을 인식해야 할 것입니다.
6. 성폭력의 예방과 대처방안은 어떻게?
성폭력은 본능적인 성충동의 문제이기 이전에 그 사회의 성에 대한 의식과 문화의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성폭력을 예방하는 지름길은 비뚤어진 성의식을 바꾸고 잘못된 성문화를 변화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성교육을 통해 건강한 성문화를 정착시키는 노력이 있어야 하며 퇴폐적인 성산업에 대한 강력한 규제도 필요합니다.
우리사회에서 성폭력을 없애기 위해서는 불평등한 성차별과 성역할에서 오는 '성의 이중적 윤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남자와 여자가 평등한 성의 주체가 되어 동등한 인격체로서 서로의 인격을 존중하며, 참다운 사랑과 조화의 길을 찾아나가야 합니다.
또한 성폭력의 예방을 위해서는 남녀의 성심리가 생리적이고 문화적인 영향으로 왜, 그렇게 다른지를 이해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조용한 곳으로 가자는 남자의 제의에 대해 여자는 단순히 둘만의 분위기를 즐기려는 마음에서 승낙하지만 남자는 성관계의 승낙으로 여기는 경우가 일반적입니다. 이 때 원치 않는 관계에서 성폭력이 이루어짐을 인식하고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분명하고 단호하게 거부하는 태도를 보임으로써 위험에서 벗어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합니다. 그리고 자극적인 옷차림, 분위기, 기회 등을 제공하지 않는 것이 성폭력예방에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폭력으로부터 자신을 안전하게 지킬 수 있는 지혜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성폭력을 당했을 경우에는 자신의 피해를 최소화하고 다른 사람의 피해도 예방하기 위해 신속하게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장 믿을 만한 사람이나 전문상담기관으로부터 구체적인 도움을 받도록 합니다. 일반적으로 피해자들은 그 사실을 혼자 해결하고 싶어하지만 슬픔이나 고통의 짐은 나누면 훨씬 가벼워지고, 의외로 문제해결이 쉬어질 수 있음을 깨달아야 합니다.
아는 사람에 의한 성폭력의 경우는 시간을 끌면 피해가 되풀이 될 수 있습니다. 따라서 피해사실을 숨기지 말고 즉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어른에게 알려 적절한 조치를 취해야 합니다.
성폭력은 인간으로서의 권리를 부당하게 폭력에 의해 침해받은 것이므로 잘못은 가해자에게 있고, 피해자는 수치심에서 벗어나 적절한 도움을 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성폭력에 대한 바른 인식과 극복을 위한 의지와 노력이 필요합니다. 성폭력은 성관계의 일종이 아니라 사회적 범죄행위에 해당되므로 피해자가 지나치게 자책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7. 나가면서
인간의 성욕은 생리적인 현상으로만 좌우된다면 동물과 다를 바가 없을 것입니다. 인간의 성충동 욕구는 정신과도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습니다. 따라서 이를 조절해 감으로써 스스로 자기를 규제하게 되어 도덕적, 윤리적인 인간으로 성장해 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건전한 이성관계를 위해서는 이러한 성심리에 대한 차이와 원인을 이해시키고,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가치관을 갖게 해주어야 합니다. 또한 남녀간의 인격적인 사랑에 대해 바로 알도록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 성은 부끄럽거나, 숨기고 싶거나, 수치스러운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성은 아름다운 사랑과 함께 어우러지면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줍니다. 진정한 성은 이기적이지 않으며, 서로 아껴주는 마음과 깊은 이해를 통해서만 실현 가능한 인류 최고의 사랑의 행위입니다. 이렇게 성은 우리 모두가 소중히 다루어야 할 고귀한 신의 선물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이 성에 대한 인식을 바로 할 때 우리 사회의 성폭력은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참고문헌
홍성묵(2001), '아름다운 사랑과 성', 학지사.
한국성문화연구소(1998), '청소년 성, 생식보건 100문 100답', 대한가족계획협회.
서울특별시교육청(1997), '성과 행복'.
이화연(1994), '우리 아이들의 성교육을 어떻게 할까', 도서출판 돌베개.
한국여성개발원(1994), '사춘기자녀의 성, 어떻게 가르쳐야 할까요?', 시청각자료교육원.
이규미(1994), '성, 바로 아는 내가 좋다!', 희성출판사.
한국성폭력상담소, 'http://www.sisters.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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