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3-14)
고린도전서 12장 27절은 우리(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며,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 정의한다. 우리가 매순간 경험하듯이 몸에 있는 모든 지체들이 기능을 발휘해야만 몸의 생명이 유지될 수 있다. 고전 12장 전체는 우리 몸은 각 지체가 고유하게 갖고 있는 기능이 발휘되고 서로 합력해야지만 존재할 수 있는 공동체임을 역설한다. 따라서 공동체성은 교회의 본질이자 존재 양식임을 알 수 있다. 공동체성이 교회의 본질이고 존재 양식이라면, 공동체성은 당연히 교회의 모든 영역과 사역에서 드러나고 발휘되어야만 주님의 몸된 교회로 존재할 수 있다.
즉 교회의 예배, 말씀, 은사, 지도력, 봉사, 양육, 물질, 교육 등의 모든 영역에서 공동체를 볼 수 있어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교회의 모든 영역과 사역에서 교회의 본질인 공동체성을 드러나게 할 것인가에 집중해야한다. 만약에 교회가 한 가지만 할 수 있다고 제한된다면, 분명 예배를 택해야할 것이다. 예배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셔서 교회로 부르신 가장 중요한 목적일 뿐 아니라, 아무리 전도와 봉사가 중요하더라도 천국에서까지 계속 지속되어야할 유일한 행위가 바로 예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무엇보다 우리는 예배에서 공동체를 볼 수 있어야한다. 그렇다면 예배에서의 공동체성은 무엇일까?
우선적으로 모든 세대가 한 가족이 되어 예배로 하나님께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예배의 효율성에 관심이 더 많기 때문에 나이별로 나누어서 예배를 드리지만, 온 가족이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므로 교회의 본질인 공동체성이 나타나야만 한다.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유초등부, 중고등부, 대학청년부, 장년부가 모두 나뉘어서 예배를 드린다. 이 경우 각 세대별 특성에 맞는 효율적인 예배를 드린다는 명분에 매달려있는 동안 우리는 한 가족이자 한 백성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하는 공동체성을 상실하고 만다. 회사나 공장 같은 조직체에서는 분업화를 통해 최고의 효율을 추구하지만, 유기체인 교회의 가장 중요한 핵심은 공동체이다.
예수님 시대에도 어린 아이들이 예수님께 모여드는 것을 제자들이 제재하고 꾸짖기까지 하였다. 이에 대해 예수님께서 분히 여기시며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막 10:14)”라고 이르셨다. 그러나 우리는 예배의 엄숙함을 유지하기 위해 어린 아이들이 주일 대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금하고 유리창 안에 가두어 놓았다. 그 경계 안에서는 자기 마음대로 해도 된다는 면허를 받은 유리창 속의 아이들은 예배는 아랑곳 하지 않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습관을 갖게 된다. 우리의 자녀들은 누구로부터 예배의 본을 보고 교회의 핵심인 예배를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참된 신앙은 공부나 잔소리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본을 봄으로 심어진다. 우리의 자녀들은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신 할아버지와 할머니께서 최선을 다해 간절히 예배드리는 모습을 보면서 배워야 한다. 처음에는 다소 어수선하더라도 온 세대가 모두 한 가족이 되어 예배를 하나님께 드리다가 설교 순서에만 세대별로 나누는 것을 제안한다. 외국의 모범적인 많은 교회들이 이미 이와 같은 온가족 주일예배를 공동체적으로 드리고 있다.
다음으로 모든 예배순서에도 모든 세대가 공동체적으로 참여해야한다. 우리 교회에서는 장년뿐 아니라 어린이도 주일예배의 대표기도를 드리는데, 예배순서와 설교 그리고 온 교우들을 위해 기도하는 대견스러운 아이의 모습 속에서 장차 하나님 나라를 기도로 섬길 무릎의 용사를 기대하며 아멘으로 화답한다. 엄숙하게 성경 봉독하는 아이의 성숙함 속에서 장차 진리의 말씀을 선포할 선지자의 모습을 매주 목도하며, 진지하게 헌금을 봉헌하는 아이의 의젓한 모습에서 장차 전 생애를 하나님께 봉헌할 제자를 그려보며 매주 감격한다. 이렇게 어려만 보이는 아이들이 예배순서에 적극 참여하는 기회를 통해 자연스럽게 예배와 섬김이 심어진다. 이제 무엇보다 교회의 핵심인 예배에서부터 교회의 본질이자 존재 양식인 공동체가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어린 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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