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희(57) 교육과학기술부 기획조정실장은 정부 부처 내에서 입지전적인 인물로 통한다. 공무원 재직 중 학사·석사학위를 받기는 했지만 고교 졸업 후 9급 공채로 시작해 1급까지 올랐기 때문이다.
"집안 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를 마친 뒤 곧바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어야 했습니다. 사실 초등학교를 마친 뒤 중학교에 간 것만 해도 기적이었죠. 흰 쌀밥 먹어보는 게 어릴 때 소원이었을 정도였으니까요."
이 실장은 1974년 경북교육청 공채에 합격, 포항 기계초교에서 공직 생활을 시작했다. 벌써 38년째이지만 교과부를 떠난 일도 거의 없다. 경북대·부산대 등 국립대학과 경북·경기·제주도교육청에서 근무하기도 해 지방의 교육 여건도 잘 안다.
세월을 고려하면 초고속 승진이라 하기는 뭣하지만 말단에서 최고위직까지 승승장구한 비결이 뭘까 궁금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평범한 진리였다.
"일에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저는 지금도 당장 공직을 그만둘 각오가 돼 있습니다. 하지만 내일 나가야 한다 하더라도 오늘 할 일에는 제 모든 걸 바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6급 시절 '교육개혁심의회'에서 기라성 같은 선배들을 모신 덕분에 기본기를 충실히 닦았던 것은 중요한 밑천이 됐고요."
그는 교과부 공무원들 사이에서 '교육행정의 달인'이란 평가를 받고 있다. 특히 현장에서 바로 통하는 아이디어가 돋보인다. 제주 부교육감 시절의 일이다. 귤 농사가 풍년이 들어 적당한 가격을 받고 팔 수 있느냐가 지역의 이슈가 됐다. 하지만 신통한 해결책은 없었고 결국 그가 '전국 학교에 귤 후식 제공'이란 묘책을 내놓았다. 그의 읍소에 전국 교육청들이 협조하면서 귤 판매는 순조로웠고 다른 기관들도 적극 동참하는 큰 성과를 거뒀다.
또 경기도 교육청 지원국장을 하면서는 경기도 지역의 외국어고 개설 조건으로 지자체의 부지`시설비 부담을 내걸어 1천억원에 가까운 국가예산을 절감했고, 부산대 사무국장 재직 당시에는 현 정부 들어 도입된 '적극행정 면책'을 전국에서 처음 신청하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골칫거리를 앞에 두고 고민만 해서는 일이 될 리가 없습니다. 일단 부딪쳐 봐야지요. 걱정할 동안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나아가야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이 같은 공로를 인정받아 그는 지난해 3월 서울시 부교육감 직무대리에 임명됐다. 당시 교과부와 서울시 교육청 주변에서는 그의 인사를 두고 '발탁'으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다. 통상 서울시 부교육감은 고시 출신의 교과부 실장 출신이 가는 자리로 인식돼 왔지만 국장급인 학교자율화추진관이던 그가 두 단계나 건너뛰어 내정됐기 때문이다. 특히 공정택 전 교육감이 중도 사퇴한 이후 직무를 대행해오던 김경회 전 부교육감마저 지방선거 출마를 위해 그만둔 터라 그는 실질적인 교육감 역할을 해야 했다.
"교과부 감사관을 지낸 경력이 어느 정도 작용했지 않나 싶습니다. 인사·납품 비리 등이 불거지면서 얻은 복마전 이미지를 개선해야 했거든요. 저도 취임식 날 '내가 부정을 저지르는 일이 있으면 즉각 고발하라'고 선언했습니다. 결국 비리 공무원 80여 명이 옷을 벗게 된 것은 안타까운 일이었지만요."
그는 호탕한 성격으로 적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듣는다. 인생의 롤모델도 중국 고전 '수호지'에 나오는 송강(宋江)을 삼고 있다. 소설 속에서 108호걸의 두령인 송강은 외모는 볼품없었지만 곤경에 빠진 사람을 보면 자신의 안위를 가리지 않고 도와줘 '급시우'(及時雨·단비)라는 별호를 얻었다.
"고향 경주까지 KTX가 개통되면서 더 골치아파졌어요. 허허허. 30분만 머물다 오는 일이 있어도 친구, 친지들 경조사에 빠짐없이 가거든요. 한 달에 한 번 이상은 고향에 다녀오는 셈인 것 같은데, 인생을 혼자 살 순 없지 않겠습니까?"
좋은 일을 많이 하면 후손들에게까지 복이 미친다는 의미인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을 좌우명으로 생각한다는 그는 아직 골프를 배우지 않았다. 분에 넘치는 일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경주 모량초교, 경주중·고, 영남대 행정학과를 졸업한 뒤 고려대에서 교육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했다.
이상헌기자 davai@msnet.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