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17대 총선에서 최초로 여성이 당 대표로 선출되는가 하면 여성 의원에게 선거대책위원장이라는 중책이 맡겨지기도 한다. 남성 중심 사회에서 여성의 권익은 생색내기 식에 불과했지만 최근 ‘여성도 능력만큼 대우받아야 한다’는 구호가 점점 힘을 얻고 있는 것. 보수적인 남성들의 입장에서 보면 오히려 역차별이 아니냐는 푸념도 들려오고 있는 이때, 비단 현실 정치 무대뿐 아니라 법조계에서도 여성의 숨겨진 힘이 발휘되고 있다. 법무장관을 비롯해 헌법재판관, 지방법원장 등 ‘금녀의 구역’으로 여겨졌던 곳에도 조금씩 ‘또 다른 성’이 등장하고 있다. 올해 사법연수원을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 서울중앙지방법원 예비판사로 활동하고 있는 강은주(법학 01년 졸) 동문 역시 ‘변화된 시대’에 ‘변화된 여성파워’를 대변하고 있다.
“세상의 절반은 여성, 법조계 여성 아직 부족하다”
강은주 동문을 만나기로 한 서울중앙지방법원 20층 휴게실. 강 동문과 나눈 첫 대화는 법조계에서 여성이 차지하는 비율에 관한 내용이었다. 최근 여성 합격자의 비율이 가파르게 상승하면서 1990년 4퍼센트 대에 불과하던 여성합격자는 2002년 23.9, 지난해는 20.9퍼센트를 기록했다. 특히 여성합격자 비율이 사상 최고로 높았던 2002년 사법시험에서는 수석 합격과 최연소, 최고령 합격을 여성이 휩쓴 바 있다. 그러나 강 동문은 점점 그 비중이 높아져가고 있기지만 여전히 여성의 진출은 저조하다고 잘라 말한다.
“제가 합격한 사시 42회의 경우 합격자 1천 명 중 1백17명만이 여성이었습니다. 너무 많이 들어왔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성비를 감안해 여성이 남성보다 조금 적다고 하더라도 50퍼센트도 넘지 않았는데 뭐가 많이 들어왔다는 것인지…. 최소한 반은 넘어야 여성의 소리를 낼 수 있다고 봐요. 그나마 공직에 새로 몸담게 되는 비율은 올라가고는 있지만, 여전히 고위 법조인은 여성이 몇 안 되는 실정입니다.”
흔히 가정사건이나 청소년 보호사건 등이 여성이 맡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법조계에 여성에게만 특별히 할당되거나 여성이기 때문에 업무에 제한을 받는 경우가 있지는 않을까라는 의문을 내비치자 강 동문은 조용히 머리를 내저었다. 강 예비판사가 경험한 법조계에는 여성 차별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성에게 특별히 할당된 분야가 있다고 생각하진 않습니다. 관심 있는 분야면 누구나 지원할 수 있지요. 자녀 양육 등 업무 외적인 일 때문에 업무에 제한을 받을 수도 있겠지만, 판사로서의 개인에 대해서는 제한을 가하는 경우는 없습니다. 남녀 가사 공동 분담이라는 측면에서 그런 점은 앞으로 남성도 겪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어요. 예전에는 여성 판사들을 지방으로 잘 보내지 않는 등의 배려가 많았다고 하지만 지금은 성별에 상관없이 각자 경험해야할 것들을 모두 겪어봐야한다고 생각해요.”
‘여성판사 강은주’ 아닌 ‘판사 강은주’
여성의 공적 영역 진출이 활발해 지면서 필요 이상의 관심이 가해지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여성 한 명을 개별적인 인격체로 보기 보다는 그 사람이 마치 전체 여성의 대표인양 간주해 지나친 기대를 하거나 감시, 비판하는 것이 쉽게 목격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여성의 수가 상대적으로 적은 법조계도 예외는 아닌 듯 하다. 이렇듯 ‘여성 법조인이 여성을 대표한다’는 시각에 대해 강 동문은 남성 한 명이 남성 전체를 대표하지 않듯이 여성 또한 그러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한다.
“여성 법조인이 어떻게 모든 여성을 대표하겠습니까? 단지 개개인일 뿐입니다. 사람이라면 진보든 보수든 각각의 성향을 가지고 있고, 특정한 이슈에 대해서도 다양한 생각을 가지게 마련이지요. 앞으로 여성의 수가 늘어나면 그런 논리도 힘을 잃을 것이라고 봅니다. 오히려 동료 (남성) 법조인들은 보통 여성들과 우리를 다르게 생각합니다. 좀 더 까다롭다고 보는 식이죠. 이런 점도 고쳐져야 한다고 봅니다.”
2년 동안의 사법연수원 시절, 졸업 후 또다시 학생으로 살았던 강 동문은 신분은 공무원이었지만 법조 실무에 관한 수업을 들으며 시험도 보며 반 친구들과 어울려 지냈던 때가 가장 좋았다고 회고 한다. 이인삼각 경기를 위해 한 달 간 연습했지만 당일에 비가 와 경기를 치를 수가 없었던 체육대회를 떠올리며 웃는 그녀는 이제 어엿한 예비판사다. 강 동문이 지난 1월 연수원을 졸업하고 예비판사가 된지도 이제 3개월 째. 예비판사이지만 여느 판사들처럼 판결문을 작성하고 자료를 찾는 일 등을 하며 바쁘게 지내고 있다. 판사의 매력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그녀는 판사는 자신에게는 가장 좋은 직업 같다고 했다.
“법조 3역 중에서 검사가 되면 친구가 좋고, 변호사가 되면 가족들이 좋고, 판사가 되면 본인이 좋다는 말이 있습니다. 업무에 있어 제약이 없는 것이 큰 매력이지요. 물론 합의라는 과정을 거치기는 하지만, 제가 깊이 생각하고 스스로 내린 판단에 대해서는 누구도 간섭하지 못합니다.”
그녀만의 특별함은 없다?
이렇듯 지금의 직업에 만족하고 있는 그녀가 법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2학년 때. 교내 사법고시반 생활 시작 3년 후 사법고시에 합격해 판사를 선택한 강 동문은 누구나 한번쯤은 거쳤을 법한 신림동 고시촌 생활의 경력은 2개월이 고작이다. 가장 빠른 정보가 흐른다는 고시촌보다는 같이 공부하며 울고 웃을 수 있는 친구와 선후배가 있는 학교만큼은 매력이 없었다는 것이 강 동문의 설명이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합격한 비결을 살짝 물어보자 ‘나만의 노하우는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들 다 하는 대로 학교 수업을 들으며 기본 서적 공부를 충실히 하는 것이 비법이라면 비법이라는 것. 교내 사법고시반에서도 많은 도움을 받았다고 고마워하는 그녀는 공부에 매진하다 보니 대학 생활 4년 동안에는 특별히 기억에 남을 만한 일이 없다는 아쉬움을 토로한다. 이런 아쉬움은 연수원 휴학 후 1년 동안 필리핀 등지로 선교활동을 떠날 수 있는 용기를 심어주었다. 현장에 바로 뛰어들기 보다는 해보고 싶은 일도 하고 봉사도 하면서 삶의 결을 풍부하게 만들고 싶었다는 것이다.
"다른 일에 비해서 법조인은 영향이 큰 직업인 것 같아요. 다른 사람들 사이의 분쟁을 해결해 주는 입장이기 때문이죠. 판사의 판결 뿐 아니라 변호사는 화해, 조정 등의 과정을 통해 다른 사람의 인생에 좋은 방향으로 관여할 수 있습니다. 판사는 궁극적으로 분쟁을 해결하는 역할을 합니다. 어떤 사건인가에 따라서 많은 고민을 해야 하며 이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누그러뜨려 줄 수 있을까 생각합니다.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완화시켜 주는 청량제 역할을 하는 거죠."
주말이면 집에서 즐겁게 쉬고 월요일이면 학교로 돌아와 책과 씨름하는 생활을 했다는 강 동문을 보며 공부란 무작정 열심히 할 것이 아니라 서두르지 말고 꾸준히 하라는 괴테의 경구를 떠올려 본다. 으레 떠오르는 차가운 판사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어린아이 같은 웃음을 지니고 있는 강 동문. 그녀가 법원에 처음 출근하던 날 마음속으로 다짐했던 것은 ‘국민들과 함께 갈 수 있는 사법부’를 만들어가겠다는 것이다. 사법부가 현대인의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청량제라고 힘주어 강조하는 강 동문에게 예비 판사가 아닌 베테랑 판사의 기상을 느낀다. |